#33 숟가락 위의 기름방울 새로 담기
Share
Editor: 프레첼 🥨
1. 시드니 출장 후 만난 <연금술사>
나는 분기마다 호주로 출장을 간다. 보통 멜버른에서 시작해 시드니에서 일정을 마무리한다. 일주일간 하루에 최소 네 개의 미팅을 소화해야 하는 고된 일정이지만, 금요일 오후 마지막 미팅을 끝내고 나면 진이 빠지면서도 한편으론 꽤 뿌듯하다. 그리고 싱가포르로 돌아가기 전, 시드니에서 보내는 짧은 자유 시간이 기다려져서 설렌다.
그 마지막 날, 마지막 미팅을 마치고 꼭 지키는 루틴이 있다. 회사 근처의 첫 번째 방앗간, Rivareno Gelato에서 티라미수 젤라토 한 스쿱을 사 들고, Barangaroo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물을 바라보며 석양을 즐기거나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 뒤에는 늘 두 번째 방앗간이자 젤라또 가게 건너편에 위치한 Title 서점에 들른다.
작년 10월, 바로 그 서점에서 <연금술사>를 우연히 발견했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이 작품은 너무도 유명해서 제목은 익숙했지만, 어쩐지 그동안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그날, 고된 일정을 마친 후의 자유로워진 몸과 마음이 충동적으로 책을 들게 했다.
Recharge*로 다녀온 남미 여행 전후로 한 번 읽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 최근 절친한 친구가 이 책을 인생 책으로 꼽으며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다시 꺼내 읽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읽었을 때, 이 책이 내게 주는 울림은 처음보다 훨씬 더 컸다. 아마도 친구와의 깊은 대화와 그 사이의 몇 달 동안 있었던, 남미여행을 포함한 인생의 크고 작은 경험들 덕분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나누려는 이야기는, 시드니에서 우연히 만난 이 책이 어떻게 내 오랜 고민의 짐을 덜어주었고, 또 어떻게 내 삶의 선로를 조용히 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Recharge: 5년 근속 후 일정 조건 하에 30일 간 유급 휴가가 나오는 회사 제도가 있다.
2. ‘행복의 비밀’ - 소년과 숟가락, 그리고 기름 두 방울
책 속에는 정말 다양한 상징과 생각할 거리들이 담겨 있지만, 오늘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한 왕이 주인공 소년에게 들려주는 ‘행복의 비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아래는 그 장면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번역에는 ChatGPT의 도움을 받았다.)
어느 날, 먼 여행을 떠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현자를 찾아 길고도 험한 여정을 마치고 한 아름다운 성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마주한 현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음악이 흐르고,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 성 안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를 기다리며 마음속으로 ‘행복의 비밀’을 들을 날을 기다렸지만, 현자는 소년에게 먼저 하나의 숟가락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이 숟가락에 담긴 기름 두 방울을 흘리지 말고, 궁전을 돌아다니거라.”
소년은 온 신경을 숟가락에 집중한 나머지, 궁전의 웅장한 벽 장식도, 정원의 섬세한 꽃들도, 현자의 지혜가 깃든 책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현자는 부드럽게 물었습니다. “궁전의 경이로움은 보았느냐?” 소년은 부끄러워하며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현자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가서 자세히 보고 오너라. 현자를 믿으려면 그의 집부터 알아야 한다.”
두 번째로 궁전을 돌며 소년은 비로소 모든 아름다움을 느끼고 돌아왔지만, 이번엔 숟가락의 기름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현자는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행복의 비밀은 세상의 모든 경이로움을 보면서도, 숟가락 위의 기름방울을 잊지 않는 데 있다.”
이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흔히들 말하는 ‘꿈과 과정의 균형’ 정도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큰 인상을 남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로 이 이야기를 마주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숟가락 위에는 정말 내가 원하는 기름방울이 담겨 있는가? 문득, 그동안 내가 지켜온 기름방울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들고 싶은 기름방울인지 스스로에게 솔직히 묻고 싶었다.
기름방울을 흘리지 않으면서도 세상의 경이로움을 누리며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기름방울이 내게 정말로 의미 있고, 진실하며, 나와 가장 가까운, 나의 진짜 꿈이길 바랐다.
3. 나의 오래된 기름방울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내 숟가락 위에 담겨 있던 기름방울은 ‘박사과정’이라는 꿈이었다. 그것은 내 목표였고, 방향이었고, 나의 진지함을 증명해주는 상징 같았다. 나는 그 기름방울을 지키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했고, 계획했고,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았다.
학부 졸업 후 7년의 회사 생활 중 지난 5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회사만 다닌 적’이 없었다. 코로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회사원으로서의 하루를 마친 뒤에는 다시 책을 펼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시험을 치르고, 점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도전하고, 또 다시 도전했다. 지원할 학교들을 하나하나 조사했고, 그 학교의 재학생들에게 콜드메일을 보내며 시차를 맞춰 줌 네트워킹을 했고, 수십 번의 수정을 거쳐 에세이를 완성했다. 하지만 지원했던 모든 학교에서 돌아온 건 불합격 통보였다. 그 해는 쓰디쓴 패배감이 깊이 남은 해였다.
싱가포르에서 인디 뮤직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마음의 기운을 회복한 뒤, 부족했던 부분들을 곱씹은 끝에,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이듬해, 나는 또 다른 삶을 시작했다. 외국 대학의 미적분학과 선형대수학 수업을 온라인으로 수강했고, 주말마다 과제를 풀고, 시험을 준비하며, 모니터 앞에서 머리를 감싸쥐며 이해하려 애썼다. 그 바쁜 와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무엇일까?
사실 내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회사 일도 재밌고, 의미 있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인데, “이걸 하면서도 공부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선택한 길이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의 파트타임 석사과정이었다. 그 지원서를 쓰기 위해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았고, 몇 분짜리 자기소개 영상을 찍기 위해 몇 시간을 준비했다. 운이 좋게도 합격과 장학금이라는 귀한 결과를 받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이내 또 다른 현실이 달려왔다.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회사, 저녁에는 수업, 밤과 주말은 과제와 팀플, 대회 준비로 이어지는 생활이 2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 한켠에서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목표가 여전히 소중하긴 했지만, 어딘가에서는 지금의 나와는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감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그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꿈을 이뤄내는 법이다"라고 믿었고, 실제로도 나는 그런 방식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어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끝내는 다시 도전해 합격했으니까.
그런데, 다시 ‘연금술사’를 읽었을 때, 그동안 애써 억눌렸던 질문이 불쑥 마음속에 떠올랐다.
“혹시 지금 이걸 계속 붙잡고 있는 이유는, 이 길이 여전히 내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자존심 때문은 아닐까?”
4. 기름방울 새로 담기
그 순간, 내 숟가락 위의 기름방울은 더 이상 빛나 보이지 않았다.
‘나답게 사는 길’, ‘진짜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삶’이라 믿어왔던 그 생각들이, 어느새 지켜야만 하는 책임이자 의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박사과정이라는 목표의 기름방울은 더 이상 지금의 나를 온전히 반영하지 않았다.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은,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고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며, 제때에 맞는 방향으로 자신을 업데이트해 가는 여정이었다. 나는 숟가락은 놓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 위에 올려진 기름방울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멈춰 서서, 그 꿈을 꾸게 되었던 처음의 나로 돌아가 보았다. 왜 박사과정을 꿈꾸었을까? 어떤 외부의 영향이 있었고, 내면의 바람은 무엇이었을까? 차근히 되짚어보니, 내가 원했던 것들은 꼭 박사라는 형식을 빌리지 않아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도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것들이었다.
불확실한 미래를 담보로 한 긴 기다림 대신, 나는 지금의 삶 안에서 그 바람들을 실현해보기로 결심했다. 계획을 다시 세웠고,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들을 하나씩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음을 새로운 방향으로 옮긴 그 순간부터, 내가 원하던 기회들이 하나씩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박사과정에 ‘지원’하고, ‘선택’ 받아야만 내가 꿈꾸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들여다보고, 그에 맞는 목표를 다시 세운 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조용히 실천해 나가자, 오히려 내가 바라던 기회들이 하나씩 삶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꿈이나 목표가 아니라 내가 나의 삶의 중심이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게는 원하는 기회를 창조해 낼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그렇게 다가오는 기회들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었다.
5. 본격적으로 숟가락 비우기
오랫동안 수납공간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책들 앞에 섰다. 한국에서부터 들고 온 시험 대비서, 문제집, 이론서, 그리고 정리노트까지, 싱가포르에서도 이사할 때마다 꼬박꼬박 옮겨 온 책들이다. ‘혹시 올해는 지원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쉽게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 책들은 내 과거의 집념과 희망, 실패와 반복, 그리고 다시 시작하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기억의 덩어리였다. 그래서 쉽게 손을 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마음이 결심했고, 손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무료 나눔 게시글을 올렸고, 한 사람이 곧바로 연락해 책을 가져갔다. 아직 남은 책들도 있지만, 조금 더 기다려 보고 나누지 못한 책들은 깔끔히 정리할 생각이다.
책을 나누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한때 나를 이끌었던 그 꿈이 이제는 내게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더 이상 붙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 꿈을 꾸었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른 방향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정할 수 있었다.
6. 그 기름방울, 아직도 당신이 지켜야 할 만큼 진실한가요?
나는 이 경험을 통해 ‘기름방울’을 바꾸는 일이 꿈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 더 맞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연스러운 성장의 일부였다. 커리어, 관계, 일상 곳곳에서 매일 최선을 다하며 살아온 덕분에, 나는 내 마음의 움직임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이제는 더 이상 현재의 나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오래된 꿈에서 벗어나, 그 자리를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로 채우기로 결심했다.
물론, 끝까지 목표를 지키는 끈기도 중요하다. 하지만 때로는 내려놓는 용기와 알맞게 업데이트하는 유연함 또한 꿈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모습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새로운 기름방울을 손에 들고, 지금의 내 삶과 바람에 더 잘 어울리는 길을 걸어가려 한다.
<연금술사>에 나온 왕의 이야기에서 말했듯, 세상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내 손 위의 기름방울을 지키는 법을, 나는 천천히, 그리고 나만의 속도로 배워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