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참을 수 없는 자극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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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만큼 ‘뇌가 망가진다’ 라는 느낌을 더 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나를 둘러싼 자극은 그 어느때 보다 넘쳐나는데, 그런 자극에 내 뇌가 감응하는 정도는 갈수록 낮아진다. ai에 대한 피로도와 모바일 세상을 가득채운 자극적인 콘텐츠들, 2분짜리 음악들이 나를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이 없이 의도만 가득찬 옷들만큼이나 말이다. 유튜브에는 ai 음성이 씌워진 요약 콘텐츠가 넘쳐나고, 그마저도 빠르게 재생해서 본다. 대체 그 시간을 아껴서 어디다가 쓰려고 - 또 다른 비슷한 콘텐츠 소비에 쓰려고 하는것일까?
나의 오감과 뇌를 자극하고, 진정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경험들을 하고 싶다. 내 시간을 어디에 썼을 때 가장 정량적/정성적으로 만족할 수 있으며, 내가 충분한 깊이로 향유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았을 때, 정답이 내 아이폰에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요즘 그래서 되도록 폰을 보지 않으려고 한다. 대신 그 시간을 창작자의 깊은 생각이 잘 반영된 것들을 향유하며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있다. 비문학과 문학 가리지 않고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근 한달 간 세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내 집 베란다에서 싱가포르의 밝은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는 경험은 꽤나 행복한 경험이다. 가장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인데, 줄거리 자체를 이루는 서사와는 별개로 (아니 뭔 바람을 이렇게 많이 피워!) 책에서 소개하는 몇몇 개념들 - 대표적으로 연민 - 과 시간과 고민이 잔뜩 담긴 아름다운 문장들이 나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엘피를 많이 가지고 있는데 엘피를 듣는 것은 음악을 앨범 단위로 소비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도파민 자극에 최적화된 사운드의 2분짜리 싱글이 아니라, 앨범 단위의 음악을 소비하면 당연히 해당 음악을 만든 창작자가 했던 고민들이 더 잘 드러나기 마련이다. 음감회를 하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우리집에 환영이다 (술은 꼭 들고와야한다).
또한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 자체가 하나의 좋은 책읽기이며, 아름다운 음악 감상이다. 대화를 통해 우리는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이 만들어지며 이를 공유하여 새로운 결론에 도달한다. 이런 대화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큰 축복이다.
마지막으로 여행 - 여행을 통해 보고 경험하는 것들이야말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창작자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닌가. 그리고 이런 결과물들이 보내는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에 대해 우리는 생경함을 느끼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면서 인생 계획을 세워나가게 된다.
이러한 만족스러운 경험들은 내 삶의 질을 높여줄 뿐 아니라, 살아가는데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또한 이러한 경험들은 ai, 모바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함께 했을 때 ‘추억’이 되며 그 만족도가 배가 되기도 한다. 이를 ‘추억 배당금’이라는 재미있는 개념으로 소개한 책이 있는데, 이는 다음 기사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험하여 추억이 되었다는 것은 필히 대화와 좋은 술이 곁들여졌을 것이고, 이는 또 ‘심포지엄’의 개념과 연결되기도 한다. 나는 심포지엄을 원하고, 또 심포지엄이 그립다. 참, ybp 매거진의 3호 주제는 심포지엄일 예정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내가 경험했었던 가장 만족스러운 추억 한가지에 대해 되돌아보려고 한다. 이 추억에는 위에 나열한 모든 요소들이 전부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추억의 당사자들은 아직도 이 추억을 원동력 삼아 살고 있다. 이번 기사는 함께 멋진 추억을 만들어준 분들께 바치는 기사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생을 살아가며 이런 멋진 추억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길 바라며 내 자신에게 바치는 기사이다.
Bilbo Baggins: “I think I’m quite ready for another adventure”.
때는 바야흐로 2022년 11월, 갑작스럽게 닥친 첫 대규모 레이오프로 회사의 모두가 멘탈이 너덜너덜해져있을 때였다. 시기와 걸맞지 않게 내게는 큰 이벤트가 하나 예정되어 있었는데 바로 회사 동료(겸 형님들)과 함께하는 뉴질랜드 여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나 포함 4명의 여행 인원들 중 레이오프 대상은 없었고, 이렇게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4명의 반지원정대는 오클랜드 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뉴질랜드 여행에는 분명한 컨셉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반지의 제왕’ 이다. 나는 약 20년 경력의 반지의 제왕 덕후(aka 톨키니스트) 인데, 관련하여 크게 3가지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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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원작 소설 작가인 JRR 톨킨의 묘지 다녀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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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반지의 제왕의 촬영지인 뉴질랜드 다녀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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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오케스트라 공연 보기
이 중 첫번째는 2016년 첫 유럽 여행에서 옥스퍼드에 있는 톨킨의 묘지를 다녀오는 것으로 진작 달성하였다. 2022년 뉴질랜드 여행은 두번째 아이템을 달성하기 위한 여행이었는데, 흔퀘히 동행해준 반지원정대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참고로 세번째 아이템은 올 초 뉴욕 여행에서 달성하였다 (^^).
따라서 이번 여행을 가기전 필수적으로 선행해야 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반지의 제왕 전 시리즈를 내 코멘터리와 함께 감상하는 것이었다. 책을 전부 읽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랬다가는 여행 전에 다 끝내지 못할 것 같아서 우선 영화를 전부 시청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여행 이후 독서를 좋아하는 분께 책으로도 선물을 드렸다). 영화는 전부 합치면 12시간이 넘기 때문에 나눠서 감상하였고 영화를 보는 동안 핸드폰은 내가 걷어갔다. 대신 음식과 음료는 전부 free flow로 제공하였다. 이 반지의 제왕 연구회는 우리 집에서 아직도 진행하기 때문에, 이참에 반지의 제왕을 제대로 감상해보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언제든 연락주시면 된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후, 떠난 11박의 여행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반지원정대 4명의 너덜너덜해진 멘탈은 ‘이유 없는 불안감’ 으로 명명한 일종의 PTSD로 나타났었는데, 레이오프가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없이 갑자기 불안해져 잠을 깨는 현상이다. 그런 상태에도 불구하고, 뉴질랜드의 정말 멋진 자연 경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신선한 계란과 우유, 맛있는 와인, 차에서 여행 내내 함께 불렀던 노래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름다운 대화들은 순간 순간 추억이 되었고, 여행이 종료되고 나니 우리의 ‘이유 없는 불안감’은 거의 대부분 치유되어 있었다.
여행은 반지의 제왕 테마에 맞게 일정 대부분을 남섬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와인을 좋아하는 콧수염 형님을 위해 중간 중간 와이너리 투어 일정을 포함하였다. 사실상 뉴질랜드 남섬 전체가 반지의 제왕 촬영지이기 때문에, 굳이 반지의 제왕만을 위한 특정 장소들 위주로 돌아다니지는 않았다. 따라서 뉴질랜드 자연 경관 위주의 렌트카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충분히 참고할만한 여행 루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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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전체 일정 소개 시트 (링크)
전체 일정과 더불어 몇몇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소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며 기사를 마무리 한다.
1. 테카포 호수: 남섬의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멋진 자연 경관을 따라 차를 타고 쭉 내려가다보면, 어느 순간 뻥 뚫린 국도 끝에 눈 덮힌 산이 등장한다. 그 때 처음으로 들릴 수 있는 동네 중 하나가 테카포 호수이다. 마치 호빗들이 살 것만 같은 푸른 빛 맑은 호수와 초록색 들판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보다보면 반지의 제왕 ost가 절로 콧노래로 나온다. 더불어 밤에는 은하수와 쏟아지는 별들을 보며 인생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뉴질랜드에 간다면 꼭 다시 방문하고 싶은 곳이다.
2. Ferg Burger @퀸스타운: 남섬의 끝에 있는 가장 큰 도시인 퀸스타운에 있는 유명한 햄버거 가게이다.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육즙이 터지는 햄버거는 처음 먹어 보았다. 뉴질랜드산 소고기 스테이크를 그대로 햄버거 안에 넣어주는데, 가격은 싱가포르 수제버거보다 저렴하다. 진짜 맛있기 때문에 퀸스타운을 간다면 적극 강추한다 (놀랍게도 음식 사진이 없다... 진짜 먹느라 바빴나보다). 아 그리고 퀸스타운에 가면 핼리콥터 투어도 추천한다. 반지의 제왕 3편에서 봉화를 피우는 그 높은 산들을 핼리콥터를 타고 볼 수 있다.
3. 밀포드사운드: 교과서에서만 보던 ‘피오르드 지형’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일단 밀포드사운드는 가는 길도 반지 원정대에 비견될만 한데, 웬만하면 터널 없이 산길을 둘러가게끔 도로 작업을 하는 남섬에서조차도 터널을 통해 접근해야 하는 지역이다. 당연히 핸드폰과 인터넷은 터지지 않기 때문에 강제로 디지털 디톡스를 할 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일단 밀포드사운드 지역에 들어오면 사방이 피오르드 지형으로 둘러쌓여 있는데, 높은 절벽에서 아주 얇은 폭포수가 떨어저 내리는 광경이 장관이다. 그리고 페리를 타고 바다로 나가면 아주 본격적으로 피오르드 지형을 관찰할 수 있다 (돌고래도 있다).
4. 말보로 - 클라우디 베이 와이너리 투어: 뉴질랜드의 유명 와인 생산지 말보로에는 클라우디 베이를 포함하여 여러 와이너리가 위치해있다. 클라우디 베이에서 운영하는 와이너리 투어를 가게되면, 지프를 타고 내부까지 들어가서 와이너리 전경을 보며 와인을 마실 수 있다. 일행 중에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보로는 꼭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5. 와이헤케 아일랜드 & 오클랜드 털보네 순대국: 북섬 오클랜드 근교의 작은 섬 와이헤케는 페리를 타고 갈 수 있다. 작은 와이너리들과 멋진 풍경의 에어비앤비들이 있는 이 섬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보같은 해프닝 겸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4명 어치의 교통카드를 잃어버린 것이었는데, 첫 버스는 훈훈하게도 그냥 태워주셨지만, 그 다음 버스는 얄짤 없었기 때문에 우버를 불렀더랬다. 근데 그 우버 드라이버는 우리가 처음 섬에 왔을 때 탔던 그 우버 드라이버였다. 즉 굉장히 작고 평화로운 섬이고, 여행에 오클랜드 일정이 있다면 하루 쯤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냥 여기 눌러 앉고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들것이다. / 반지원정대 4명 모두 한국인인지라, 여행 3일차에 바로 한식이 당겼다. 그 때 우리를 구원해준 것은 오클랜드에 있는 ‘털보네 순대국’ 이었는데, 오픈하자마자 우리 뿐만 아니라 뉴질랜드 현지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여기는 “찐”이구나 싶었다. 먹어본 결과 정말 “찐”이기 때문에, 오클랜드에서 한식이 먹고 싶다면 다른 곳 갈 필요 없이 털보네 순대국을 가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