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Hyesoo Timezone | HST): Happy Stupid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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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설혜수 @hyssl.kr
(HST) Un : dead
6월 초 바르셀로나 여행을 앞두고 있었다. 대학 시절 밤새워 굿즈를 만들고 잡지를 만들던 추억을 공유하는 두 친구와 함께 삼일간 진행되는 ‘프리마베라 사운드’ 음악 페스티벌의 full access 티켓을 사두었던터였다. 기대감에 가득차있어야 할 시기에 알 수 없는 무력감에 빠졌다. 주말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침대에 누워 무한 스크롤을 내리며 짧은 영상만 재생했다. 어떤 도입부가 관심을 끄는지, 어떤 식의 정보 전달 방식이 효과적인지.. 이런 생각을 하며 보았으면 모르겠을까, 뇌의 모든 전구를 끈 채로 소비해버리고 말았다. 바르셀로나 여행도 이렇게 사전 공부 없이 떠나도 되려나 걱정이 들었다. 휴대폰을 끄는 순간 지금까지 무엇을 보았는지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 참을 수 없는 자극의 가벼움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여행만큼은 모두가 합의한 그리니치 기준의 표준 시간대에서 벗어나 Hye Soo Timezone (HST)을 적용하여 해가 뜨건 달이 뜨건 유의미한 자극들을 곱씹으며 나의 일상도 리셋해보기로 했다.
(HST) Oh : Sh*t!
프리마베라 사운드의 공식적인 일정에 하루 앞서 opening day가 있었다. 메인 베뉴인 Parc Del Forum에서 소규모 공연이 열렸는데 그중 우리는 Caribou라는 캐나다 출신의 실험적인 전자음악을 만드는 뮤지션 겸 프로듀서의 무대를 보고 싶었다. 아뿔싸! Opening day 티켓은 우리가 구매한 full access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베뉴에 도착해서 표 검사를 할때야 알았다. 당일 티켓은 이미 매진 상태였고 무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일분 일분 타들어가는 마음과 달리 들어갈 수 있는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발길이 쉬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이후 30분은 페이스북 그룹에서 티켓을 양도해주겠다는 사람을 찾아, 잠깐의 환희를 맛보았다가 40 유로를 뜯기는 결말을 맞으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공연이 15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을때 마지막으로 구걸에 가까운 부탁 끝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무대 앞까지 전력 질주했고, 마지막 곡이었던 can’t do without you을 볼 수 있었다. I can't do without you 라는 가사 그대로 함께 간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이 무대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바르셀로나까지 오지 못했을 것 같아 벅찬 감정이 들었다. 친구들도 같은 감정이었을까 그룹 허그를 하며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이 무대를 시작으로 이번 여행의 추억을 더한 음악을 켜켜이 쌓아올릴 수 있었다.
(HST) Live : as f***
본격적인 페스티벌 일정이 시작되었다. 프리마베라 사운드는 가장 이른 공연이 오후 4시쯤 시작되어 다음날 새벽 6시에 마지막 공연이 마무리되는 엄청난 스케일을 보여줬다. 우리 일행도 저녁 6시에 숙소를 나서 새벽 4~5시쯤 귀가하는 스케쥴을 반복했다. 아시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무대가 많았던터라 졸리고, 아프면서도 포기할 수 없었다. 한 팀 당 1시간 15분에서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시간을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spotify로 음악을 소비할때와 다르게 플룻, 색소폰 등 여러 악기 소리에도 집중할 수 있었고, 대형 스피커가 주는 쿵쿵거림에 같은 음악도 다르게 다가왔다. 맥주와 담배 냄새가 섞인 바르셀로나의 건조한 공기 아래에서 셋 리스트의 구성 의도, 시각적으로도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한 무대 장치와 퍼포먼스도 재미를 더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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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lly Lee Owens는 나의 예상과 가장 다른 아티스트였는데, 앰비언트한 테크노를 한다고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무대 위에서는 조명과 영상을 적절히 잘 활용해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서 꿈 속에 들어와있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줬다. 무엇보다 앰비언트한 음악임에도 그녀가 내뿜는 에너지가 엄청났다. (공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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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DJ Simo Cell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신기한 악기를 들고와서 입으로 불거나 손으로 치면서 실시간으로 음을 만들고, 조립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DJ의 역할을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장소에 아무도 목석처럼 서있지 않았다. 확실히 관중을 신나게 하는 재주를 보여줬다. 1930~60년대 존 콜트레인과 같은 연주자들이 프리 재즈의 전성기를 이끌며 즉흥 연주를 보여주었다면, 2020~50년대는 전자음을 현장에서 관객과 교류하며 연주하는 DJ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로 기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쉽게도 공연 영상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최근 뉴욕에서의 Lot Radio 라이브 공연 영상을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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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ating points는 라이브 페인팅을 하는 Akiko Nakayama와 함께 무대에 올라, 몽환적이거나 강렬한 전자음을 서로 어우러지는 여러 색의 페인트 쇼와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공연 영상)
오후 8시 노을이 지기 시작할때의 세 자매가 결성한 밴드 HAIM의 무대를 보며 알 수 없는 눈물이 차올랐는데,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하나만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해파리 같은 상태로 느끼던 무기력함의 한가운데에서 건져올려져, 지금 이 순간에 오감을 집중하고 있다는 행복감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을 만들게 해준 나와 내 주변 상황의 무탈함에 감사했다.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농 익은 귀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또다른 음악을 즐길 경험들에 대한 기대감도 동시에 들었다. 한번에 수도꼭지 여러개를 틀어 급수대를 넘어 운동장 흙바닥에까지 물방울들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 나 살아있구나’
(HST) Jet lagged : Happy
프라마베라 기간 내내 일렉트로닉부터 드림팝, 인디팝, 스페이스록까지 다양한 장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콘서트가 아닌 페스티벌이다 보니 새롭게 알게 된 아티스트와 트랙들이 많았다. 그래서 페스티벌은 끝났지만 나만의 프리마베라는 계속 되고 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안에서 공연 영상들을 무한 복습하면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한 뇌와 마음의 근육을 길러야지 하는 다짐을 하기도 했으며
“All I want in life's a little bit of love to take the pain away”
Ladies and Gentlemen We Are Floating in Space by Spiritualized
다음 10년 동안 내가 정말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생각해보게 만드는 리드미컬한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If you built yourself a myth, You'd know just what to give,
Materialize, Or let the ashes fly”
Myth by beach house
사실 이 생각들이 아주 놀랍도록 새로운 것들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는데, 다른 창작자들의 언어와 음악으로 그 생각들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을때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발매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회자되는 Charli XCX의 Brat 앨범을 천천히 들으며, 지금 시대의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와 그 안에 깔린 감정의 결을 이해해보려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프렌치 DJ Simo Cell의 farts를 틀고 헤드뱅잉하며 뇌 속에 남은 생각 찌꺼기들을 아쉬움 없이 내보내기주기도 했다. 겹치는 스케줄상 아쉽게 놓친 무대들을 유튜브 영상으로 찾아보며 새롭게 알게 된 음악들도 있었다. FKA twigs의 폴댄스를 두 눈에 담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쉽다. 남은 올해는 이렇게 프리마베라에서의 경험을 더 디깅하면서 보내면 딱 알맞을 것 같다. 하나의 자극이 가져다주는 감동이 식기도 전에 또다른 자극들에 파묻히기보다, HST에 따라 충분히 음미하며 시간을 보내야겠다.
프리마베라와 바르셀로나는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
음악을 듣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감각을 더 자주, 더 깊게 경험하라고.
바보 같고 후회하더라도, 더 많이 생각하고, 논쟁하고, 사랑을 잃지 말자고.
“Don’t you want me to wake up, Then give me just a bit of your time,
Arguments are made for make ups.. Dance yourself clean…
All I want in life’s a little bit of love.”
(Dance yrself clean by LCD soundsyst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