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서울 시티 가이드

Editor: 설혜수 @hyssl.kr

 

4월 말 서울 출장을 다녀왔다. 출장 일정 중에 생긴 루틴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독립서점을 들르는 일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서점을 찾았고,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진열된 책들이 시선을 끌었다. 브이로그를 텍스트로 옮긴 듯한 책들, 탄핵을 기념하며 책방 주인이 추천한 책들, ‘서울살이’에 대한 기록들도 다양하게 보였다. 그중에서도 서울에 관한 인터뷰를 엮은 책 한 권이 인상 깊었다. 비이커 바이어, 디자인 회사 대표 등 감각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 30명이 각자의 시선으로 서울을 이야기했는데, 개별적으로 진행된 인터뷰임에도 불구하고 떠올리는 이미지나 추천하는 공간들이 놀라울 만큼 겹쳤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서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단어는 ‘다이나믹’이었다.

실제로 두 달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콜드플레이 공연의 여운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었고, 한강변에는 러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방 경기 응원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유니폼을 입고 서울역에 모인 야구 팬들의 모습도 보였다. 날씨도, 사람들의 관심사도 빠르게 바뀌지만, 언제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러닝 선글라스와 전 세계 러닝 브랜드의 아웃핏, ‘페이스’, ‘zone 2’, ‘PB’ 같은 단어들이 자연스럽게 일상 대화에 섞여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이 도시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이 다이나믹함이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지도 앱에 저장해 둔 장소를 하나씩 눌러볼 때마다, 문을 닫았다는 메시지가 계속 나왔다. 싱가포르에 거주한 지 이제 1년 반도 채 되지 않았지만, ‘어디 갈까?’라는 설레는 질문에 자신 있게 떠올릴 수 있는 장소가 확연히 줄어든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열심히 누리며 살고 있는 친구들 덕분에 여전히 좋은 곳에서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올해도, 내년에도 이곳들을 다시 다닐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반나절 정도의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서울 시티 가이드를 공유하고자 한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나만의 좋아하는 장소들도 함께 담았다. 술, 음악과 한식을 좋아하고, 고요함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더 마음에 들 것이다.

 

➊ 경복궁 코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길 바라는 클래식을 원한다면”

Room 5 → 자하문로 10길 → 서촌 가락 → 참 제철 바

 

  • Room 5

로스터리를 함께 운영하는 카페이다. 경복궁역 3번 출구를 나와 인왕산 등산로 입구까지 가능 방향으로 쭉 걷다 보면 바 좌석으로만 이루어진 작은 카페가 나온다. 통창이라 안에서 이미 커피를 한잔 곁들이고 있는 사람들과 그 앞에서 한잔 한잔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려주시는 바리스타분을 먼저 볼 수 있다. 따뜻한 카푸치노를 시켰는데 커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 표현에 한계가 있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였다. 지금까지 한번도 맛본 적 없는 부드럽지만 밀도 높은 우유 크림 맛이 기분 좋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밀린 수다를 소근 소근 나누기에도 좋은 장소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살짝 추운 날씨마저 좋게 만들었다.

  • 자하문로 10길

고즈덕한 서촌 분위기와 어울리는 국내외 브랜드 스토어들이 이 한 길을 따라 모여있다. 한번 사면 이제는 5년, 10년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찾게 되는데, 유행을 쫓아가기 보다 자신만의 속도로 운영되는 브랜드들이 많아 자주 방문하게 된다. 제일 먼저는 이 거리에 비교적 최근 합류한 모노하를 볼 수 있다. 양질의 미니멀한 의류들과 생활용품을 구경할 수 있다. 가게를 나오면 건너편에 베이스레인지가 보인다. 프랑스와 덴마크에서 시작된 지속가능한 라이프스타일과 언더웨어를 선보이는 브랜드로, 트렌드나 체형에 관계없이 입을 수 있는 제품들이 많다. 오가닉 코튼이나 리사이클 소재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컬러도 블랙/화이트 외에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입을 수 있는 뉴트럴톤이 많다. 바로 옆에는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더일마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만날 수 있다. 더일마의 제품 자체는 디테일이 많이 들어간 화려한 옷들이 많았지만, 중정 한가운데를 자리한 나무와 그 가장자리에 배치한 소파 좌석이나, 대들보 아래 놓인 현대적인 디자인의 소파와 피팅룸 등등의 요소들을 통해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잠깐 길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가면 램쉐클이라는 브랜드의 스토어를 만날 수 있다. 아프리칸 장식과 액자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면 고대 이집트와 아프가니스칸의 장신구들에서 영감을 받은 주얼리, 테이블웨어, 향수와 의류를 만날 수 있다.

  • 서촌 가락

여기까지 구경을 했으면 슬슬 배고플 타이밍이 맞다. 서촌 가락은 팔도 강산의 막걸리와 여기에 어울리는 안주들을 함께 곁들일 수 있는 곳이다. 으슬으슬한 날씨와 오랜만의 한국 방문으로 전적으로 개인적 기호에 따라 파전에 소주를 마시긴 했지만, 상호명에서 느껴지듯 국수가 유명하다. (그렇지만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만 먹어도 맛있을 정도로 모든 음식이 맛있다.)

  • 참제철 바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쉽다면 경복궁역 바로 앞에 위치한 참제철 바를 방문해보자. 작년 아시아 베스트 50 바로 선정된 바 참의 자매바인데, 비교적 덜 알려져 있어 예약 없이도 방문할 수 있었다. 조용한 분위기에 조도 낮은 조명으로 아늑한 분위기였고, 계절마다 제철 재료를 활용한 칵테일 메뉴를 선보인다는 친절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봄찬 마티니’를 시도해보았는데, 한라봉 껍질이 들어간 진에, 세가지 제철 과일/채소의 피클을 함께 마실 수 있었다. 어딜가나 바에서는 비슷한 맛을 기대하게 되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은 한국에서만 마실 수 있는 메뉴들이 많아 외국인 친구를 데려오기에도 좋은 장소겠다 생각이 들었다. 국적불문 친구들과 편한 대화를 즐길 수 있는 장소로 추천한다.



➋ 연남 & 합정 코스 “젊은 기운과 함께 즐기는 커피, 음악과 국밥”

 앤트러사이트 연희점 → 사운즈굿 스토어 → 어쩌다 책방 →  합정옥


  • 앤트러사이트 연희점

한국의 대표적인 스페셜티 커피 로스터리 중 하나인 앤트러사이트에서 운영하는 공간이다. 구두공장을 개조한 합정 본점이나 한남 대로변에 위치한 유리 파사드와 인더스트리얼한 외관이 눈에 띄는 한남점도 유명하다면, 연희점은 연희점만의 공간 특징 때문에 자주 방문하게 되는데, 2층 전면에 난 가로로 긴 통유리창은 건너편 학교를 포함한 풍경을 담고, 계절이나 시간에 따라 다른 장면들을 목격하게 된다. 특히 저녁에 방문하면 실내에 조명을 어둡게 만들어 바깥의 풍경이 더 눈에 들어오게 된다. 여기에 들리는 재즈 플레이리스트까지 커피를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 사운즈굿 스토어

연희동에서 굴다리 아래로 내려오면 연남동인데, 사운즈굿 스토어에 들러 재즈, 일렉트로닉, 팝, 하우스에 걸친 장르에서 최근 인기가 많은 앨범들만 모아 한자리에서 둘러볼 수 있다. 예컨대 이번 출장 방문에서 Fred Again의 Actual Life를 구매했는데, 한장만 사자는 스스로의 다짐을 지키기 위해 Erykah Badu의 Mama's Gun (네오 소울), Ryuichi Sakamoto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앰비언트/클래식), 영화 미나리 사운드트랙 (모던 클래식)과 경쟁해야 했다. 덤으로 앨범마다 대표 곡을 바로 들어볼 수 있는 QR코드도 있고, 귀여운 굿즈들도 많다. 

  • 어쩌다 책방

사운즈굿 스토어 근처에 있는 독립 서점이다. 책과 전시를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인파로 북적이는 연남동에서 몇 안 되는 고요한 공간이지 않을까 싶다. 많은 책들의 각각의 매력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는지나 ‘어떤 책과 함께 보면 좋다’는 코멘트들을 함께 두기도 하고, 책을 사면 정성스레 포장도 해주시는데 공간을 운영하는 분들의 방문객들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잘 느껴졌다. 

  • 합정옥

무려 6년 연속 미슐랭 가이드를 받은 곰탕집이다. 뽀얀 국물이 아닌 맑은 국물에 천엽, 양지가 토렴한 밥과 함께 들어있다. 한입 먹자마자 하루의 피곤이 사르르 녹는 맛! 나도 모르는 새에 “사장님, 저희 참이슬 한병만요”를 외칠 수 있다.

 

합정까지 가지 않고, 연희동에서 코스를 마무리하고자 한다면 합정옥 대신 ‘녹원쌈밥’을 추천한다. 단독주택에 있는 식당인데, 가정집 같은 정겨운 분위기에서 갖가지 야채쌈과 함께 제육, 오징어, 버섯을 삼합처럼 먹을 수 있다. 



➌ 강남 코스 “멕시코에서 K-town까지”

비야게레로 → 반포 한강 공원 → 길목


  • 비야게레로

삼성중앙역 삭막한 코엑스와 빌딩을 지나 오면 홀로 멕시코 바이브를 뽐내는 작은 가게가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서울에서 먹어본 타코 중 가장 맛있었다. 메뉴는 심플하게 대여섯 종류의 타코와 음료만 있다. 혀와 혼합 (혀, 살코기, 껍데기, 위가 골고루 섞인 메뉴)을 먹었는데, 비주얼은 굉장히 심플했다. 플락스틱 접시에는 작은 토띠아위에 고기, 그리고 그위에 듬뿍 올린 고수가 있었다. 라임즙을 내어 한입 베어먹었는데, 입 안에서 터지는 돼지 기름과 쫄깃한 식감 그리고 고수의 알싸함이 혼상의 궁합이었다.

  • 반포 한강 공원

배를 채웠으니 소화를 시켜야지. 삼성중앙역 지하철역을 이용해 9호선을 타고 신반포역에 내리면 잠수교가 있는 반포한강공원이 코앞이다. 

  • 길목

소화가 되었으면, 무엇을 해야겠는가. 다시 채워줘야지. 회식 장소들이 잔뜩 있는 강남에서 의외로 기억에 남는 고기집은 잘 없지 않은가. ‘길목’은 맛도 가격도 괜찮아서, 5번 이상 방문한 곳이다. 사이드로 먹을 수 있는 된장 술밥과 계란찜까지 완벽하다. 콜키지 프리라 와인이나 위스키를 가져가는 것도 추천이다. 



➍ 신당 & 옥수 코스 “러너들을 위한 코스”

카페 와일드덕 → 한강 러닝 → 치킨매니아


  • 카페 와일드덕

본격적으로 뛰기 전에 몸도 풀고, 날씨도 즐길겸 커피를 한잔 하자. 해방촌 와인바 ‘와일드덕앤캔틴’의 자매 카페이다. 입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하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면 건물에 둘러쌓인 테라스 공간이 나온다. 밖에서는 잘 안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이 카페를 방문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여유로운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다. 햇빛을 즐길 수 있는 날씨에 테라스를 놓칠 수 없지 않은가.

  • 한강 러닝

카페 와일드덕에서 커피 한잔을 수혈하고 옥수역으로 이동하자. 3번 출구를 나와 5분 정도만 걸으면 뻥 뚫린 한강 공원이 나온다. 반포대교까지 찍고 돌아오면 5km 정도가 되는데 한강을 보며 뛰니 진정한 ‘seoulite’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함께 뛰는 또래의 사람들도 많이 보여 나도 종착지까지 힘을 내서 뛰어 본다.

  • 치킨 매니아

사실 내가 열심히 뛴 이유는 치맥을 생각하고 뛰었기 때문이다. 마침 옥수역 근처에 한번쯤은 보았을 법한 치킨집이 있다. 체크 혹은 꽃 무늬 패턴의 식탁보, 그위에 올라간 두꺼운 유리와 황토색 가죽 쿠션의 등받이가 있는 철제 의자. 생맥주와 후라이드 치킨 & 국물 떡볶이 세트를 시킨다. 아는 맛인데도 뛰고 나서 먹으니 더 꿀맛이다. 열려 있는 자리에서 들어오는 찬 바람까지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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