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내가 서울을 사랑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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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박지현 @_j_ihn.b
*읽기 전 주의사항 : 서울하면 생각나는 음악과 함께 읽어주세요. 혹은 델리스파이스의 차우차우 추천드립니다.
25년의 겨울은 귀가 떨어져나갈듯한 추위의 서울에서 맞이했다. 가족여행과 새해, 출장일정이 겹쳐 한달하고도 반정도되는 기간동안 머물렀다. 서울에서의 첫 2주정도는 이 추위가 너무 반가웠지만 그 마저도 얼마 안갔다. 겨울에는 밍기적 세포가 활성화되는 것일까. 아주 게으른 아침이 계속됐고 내 요가 루틴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서울에 온지 2주만에 추위를 핑계로 얼른 싱가포르로 돌아가고 싶었다.
사실 출장 기간의 호텔 생활은 생각만큼 그렇게 즐길만한 일이 아니다. 업무를 끝내고도 호텔로 돌아와 늦게까지 일을 해야한다. 그 중 나의 유일한 낙은 일을 마무리하고 모든 불을 끈 어두컴컴한 방에서 서울의 야경을 즐기는 것이었다. 싱가포르로 돌아가기전날, 모든 출장 일정을 마치고 동료들이 모여있는 호텔방에서 힘겨웠던 출장의 마무리를 축하했다.
금요일밤의 대화가 무르익으며 호텔 벽 한 면을 다 차지한 서울의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느 저녁과 같이 방안에 불을 딱 끄는 순간, 야경이 더 반짝 빛났다. 다들 창가로 가까이 다가가 서울에 대한 감상평을 남기기 시작했다.
“우리 서울에 어울리는 음악 들어보자”
“서울에 어울리는 음악? 난 딱 있지.”
“오 나도. 델리스파이스-차우차우”
“왜 난 서울이 싫을까? 뭔가 긴장하게 돼”
“긴장? 답이 정해져있어서 그런가? 성공의 길은 정해져있거나 아님 저열하거나..”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잖아. 전 이 도시가 창의적인 것 같아. 아니 사람들이.”
“생각해보니, 이 도시에게 기회를 덜 준 것 같아. 그냥 나에게 서울은 대학생활이네. 딱 그때만 살았어 이 도시에.”
“그렇네 나도야. 그래서 더 애틋한 것 같기도?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
“대학생때? 그냥 술마시는거 아니야?”
“난 서울 직장 생활이 끔찍했어. 그때는 새벽 야근은 엄청했거든. 물론 나의 자양분이 됐지만 그래도 좋은 기억은 아냐”
“난 출근길. 회사 사람 스트레스.”
“우웩”
“그래도 난 좋아. 여전히 여기에 내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친구들의 삶을 보면 멋있어.”
“맞아, 나한텐 서울이 곧 대학생활이라서 그런지 뭔가 긴장되고 무언의 압박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창의적이고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아”
“편의점도 다 Zero잖아. 이건 못따라가. 힙한 곳도 너무 많아.”
서울에서의 시간
서울이란 도시는 나에게 도전이자 처음으로 많은 인간관계를 만들어준 도시이다. 한국에서의 “In Seoul”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참 크다. 그게 대학이든 직장이든 서울안에서 생활을 시작한다는 게 굉장히 큰 도전이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20살이 되어 살아본 서울은 해가 갈 수록 다르게 느껴졌다. 20살 때는 대학교 캠퍼스만 빙빙 돌았고, 21살에는 성수 나들이를 갈 정도의 취향을 갖췄고 (정확히 18년도쯤 성수와 뚝섬이 뜨기 시작했다. 볼빨간 사춘기와 함께.), 22살에는 해외 살이를 하며 서울을 그리워 하기도 했으며, 코로나와 함께 돌아온 23살에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24살이 되어서는 제대로된 직장인의 연애를 해보기도 했으며 덕분에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서울의 4계절을 느낄 수도 있었다.
나에게 해마다 다른 서울을 만들어 준건, 사람들이었다. 대도시의 인간관계란 참 변화무쌍하고 가끔 벅차고 때로는 모든 부분을 차지하게 만든다. 영원한 건 없다 되뇌이게 만들지만 결국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순간으로 기억된 경험들이었다.
출장이 끝난 금요일밤 불 탁! 끄는 순간 보였던 서울의 야경. 이런것들이 순간으로 기억된 경험들이다. 나의 이런 기억은 많은 부분 서울에 자리잡고 있다. 쉬운 경험들이 어디있겠냐만은, 나에겐 정직한 노력이후에 얻게되는 찰나의 기분과 시간이 보통 ‘순간’으로 기억된다.
서툴렀기 때문에 이 시기의 결실들은 크고 작음 없이 기억될 순간으로 남았다. 내가 서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이 순간들이 영글어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외부에서 본 서울
여행을 하면서 그 나라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기념품을 고르는 것은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다. 향수 브랜드 르라보 (LE LABO)에서는 도시의 특색을 담은 City Exclusive Perfume을 출시한다. 암스테르담의 르 라보 매장에는 이 도시별 향수를 모두 모아두었다길래 여행 중 꼭 들러봐야겠다 생각했다.
파리, 암스테르담, 뉴욕.. 큰 도시들의 향수 사이에 나에겐 “Seoul”이 단연 돋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서울향수를 살 건 아니었지만, 향이 좋다면 구매할 생각도 있었다. 파리 향수는 오크향이 났고, 암스테르담은 우디한 머스크향이 났으며 뉴욕은 스파이시하면서도 달큰한 향이 났는데, 서울의 향은 오렌지향. 시트러스 그 자체였다.
외부에서 보는 서울은 어떤 이미지일까? 단순히 르 라보(LE LABO)의 식견을 빌어 말할 수는 없지만, 생각해보면 서울은 뭔가 젊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파리하면 해질녁의 낭만과 재즈를 떠올리고, 베를린하면 테크노와 쿨한 패션을 떠올리는 것과 같이 내가 생각하는 서울은 빠른 혁신, 젊은 에너지, 창의성이 있는 도시로 비춰진다.
서울의 bgm
각자가 이해하는 도시를 더 쉽게 설명하는 방법은 도시마다 어울리는 음악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크고 작은 결실이 있어서일까, 내가 생각하는 서울의 bgm에는 어딘가 아련함과 간절함이 들어있다.
검정치마 - Antifreeze
검정치마는 밴드처럼보이지만 조휴일(Holiday Jo)이 이끄는 1인 프로젝트 밴드다. 이 노래의 도입부를 좋아한다. 데뷔앨범에 수록된 곡임과 동시에 리메이크가 될 정도로 검정치마를 대표하는 곡이다. 멜로디 뿐만 아니라 가사를 곱씹을수록 ‘그래 이게 명곡이지!’ 싶은데, 나의 좁은 식견으로는 운명으로 시작한 사랑과 대비되는 변모한 차가운 사랑도 여전히 사랑임을 이야기하는게 아닌가 싶다.
“우린 오래전부터 어쩔 수 없는 거였어
우주 속을 홀로 떠돌며 많이 외로워하다가
어느 순간 태양과 달이 겹치게 될 때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혁오 - Big Bird
이 곡은 혁오 2018년 EP 《24 : How to find true love and happiness》에 수록된 곡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과 내면의 불안을 표현한 곡이다. 3분 남짓의 짧은 곡으로 초반부터 기타가 멜로디를 이끄는 구성의 곡인데, 초반에 같은 코드의 멜로디가 반복된다. 가사 또한 비슷한 단어를 반복하는 형식으로 3분간 몰아치는 이 음악을 듣고 난 후에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기억의 기억을 훑어야 해
꽉 잡은 밤하늘을 돌봐야 해
늘 검은 천장으로 여겼더니
달은 열심히 떠올라
보름달을 보여주네
반복에 반복을 더해야 해
아쉬워라 말하진 않을 거야
아 이렇게 지내다 옆을 보니
이젠 다 크고 살기 바뻐
어른 놀이를 하네
쉬어도 쉴 틈은 없어야 해
오늘도 무사히 잘 넘겨야 해
언젠가는 나도 버려질 거야
결국 이러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빈지노 - break
빈지노를 이상형으로 뽑아보지 않은 내 동년배 여성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빈지노는 완벽의 아이콘이다. 그의 가사엔 자랑/허세/flex가 아닌 음유와 유머가 있다. 어느날 욕을 퍼붓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이 노래를 반복재생했던 기억이 있다.
“난 자유롭고 싶어
지금 전투력 수치 111퍼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싶어
길거리고 가서 시선을 끌고 싶어
내가 보기 싫은 새끼들의 지펄
닫아버리고 내 걸 열어주고 싶어
그래
할말은 하고 살고 싶어
그래
그래서 내게 욕을 하나 싶어
신경 꺼”
델리스파이스 - 차우차우
1997년에 델리스파이스가 발표한 곡으로 한국 인디씬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 중 하나이다. 사실 최근까지도 이 노래의 제목을 “너의 목소리가 들려”로 알고 있었다. 가사의 절반이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외치는 노래이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이 역시 몽환적이고 쓸쓸한 분위기의 기타로 시작하고, 그 뒤에 덤덤한 목소리의 보컬이 음을 길게 내며 표현하는 가사는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리움을 호소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하는데도”
유희열 - 여름날 (Feat. 페퍼톤스 신재평)
발랄한 통기타 스트로크로 시작하는 이 곡은 지난 여름날 사랑을 회상함과 동시에 발랄한 멜로디 때문인지 시원섭섭한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버스 창가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들었었다.!
“바람결에 실려 들려오던
무심히 중얼대던 너의 음성
지구는 공기 때문인지 유통기한이 있대
우리 얘기도 그래서 끝이 있나봐
…
혹시 어쩌면 아마도 설마
매일 매일 난 이런 생각에 빠져
…
너도 가끔 기억을 할까
눈부시게 반짝거리던
푸르른 지난 여름날 우리를”
내가 서울을 사랑하는 이유
내가 26년을 살아오며 느낀 한국이라는 사회는 ‘맥락’이 참 중요한 환경이다. 서로 맥락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더 센스있음과 동시에 눈치를 보고, 변태같이 꼼꼼하거나 디테일하기도 하며, 전체의 맥락에 벗어나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 동시에 높은 잣대가 생기고, 그 과정에서 공감과 연대가 더 중요해진다(정). 그 과정에서의 극복들은 더욱 더 단단한 개성과 생각을 낳고 이것이 한국을 서울을 대표하는 젊음의 에너지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미완성의 과정에서는 젊음의 에너지가 발현된다. 서울이라는 도시도 그리고 서울에서의 ‘나’도 미완의 과정에 있었다. 모든 게 편리한 완성형 싱가포르에 살며 ‘언젠가 서울로 돌아가야지’하는 막연한 생각이 자주들었는데 그 생각의 근원을 파고들어 길게 적다 보니.. 이거 I love Seoul 티셔츠를 ybp 굳즈로 만들어야 할까.
사실은 싱가포르에서도 서울과 같이 ‘순간으로 기억될 경험’들이 늘어나고 있다. 5년뒤에는 내가 싱가포르를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기사를 적고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