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방구석 도시여행 - 옷장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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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가셔도 인스타 열심히 하시고, 날씨 덥다고 반팔만 입고 운동복만 사시면 안 돼요.”
싱가포르에 오면서 걱정했던 몇 가지가 있었다. 이곳이 사회초년생의 월급과 맞먹는 월세를 매달 내야 한다는 것, 연애 불모지라는 것. 하지만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건, 옷을 입거나 보는 재미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 순간, 내 사고회로 속 ‘경계’ 경보가 울렸다.
옷은 내 삶의 활력을 더해주는 요소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유년 시절의 결핍과 관련이 있다. 우리 가족은 옷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옷이란 그저 외부환경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한창 외모에 민감한 사춘기 때 유행하는 브랜드 옷을 입고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고, 동네 백화점의 이벤트 존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몇 달에 한 번씩 옷을 골라야 하는 것에 뾰루퉁했다. 세뱃돈을 모아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을 살 때의 설렘을 아는가.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며 신중하게 고민하고, 리뷰를 몇 번씩 읽고 주문 버튼을 누르던 그 순간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두 번째는 단순히 ‘패션을 좋아한다’는 차원을 넘어, 멋진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알고 싶고, 그들을 소비함으로써 지지를 표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패션 디자인 및 머천다이징을 복수전공했다. 물론 현실이 녹록지만은 않았다. 저주 받은 손재주라 실습실에서 밤을 새우며 씨름해야 했고, 청소하러 온 아주머니와 아침 인사를 나눈 적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멋진 사람들을 만났고, 내 인생에서 가치를 두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기회도 얻었다.
일례로 밀라노에서 교환학생을 할때, 조별 과제로 럭셔리 브랜드의 새 시즌 제품을 조사해야 했고, 내 조는 처음 들어보는 ‘Chopard’라는 브랜드를 맡게 되었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고급 주얼리 브랜드’라는 것 외에 특별한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직접 매장을 방문한 순간, 내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보디가드가 문앞을 지키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 긴장된 마음으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고목으로 만든 가구들 위로 주얼리 제품들이 박물관의 유물들처럼 전시되어 있었고,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코지한 분위기였다. 댄디한 수트를 차려 입은 점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강한 이탈리안 액센트의 영어와 이탈리아어를 섞어가며 맞이해주셨다. 친절하게 어느 학교에서 왔냐, 어느 교수님 수업이냐 물어봐주시며, 브랜드 설명과 함께 여러 제품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유창한 영어가 아니었고, 지금은 그 설명이 전혀 기억나지 않음에도 그분이 가지고 있던 브랜드에 대한 애정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이 날의 방문은 내가 S모 SPA 브랜드에서 알바할 당시 ‘이 사이즈 있나요? 이 옷이랑 저 옷이랑 어울리나요?’ 와 같은 질문에 피곤에 찌든채로 퉁명스럽게 ‘있어요, 없어요, 잘 어울려요’ 대답했던 것과 너무 대비되었다. 좋은 제품은 물론이고, 거기에 제품과 브랜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애정과 고민이 담긴 이야기가 더해지니 몇 십분만에 ‘이 들어보지도 못한 브랜드는 뭘까’의 생각에서 내가 이런 브랜드를 안다는 것만으로도 멋짐 지수가 올라간 것 같은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물론 내가 경험한 친절도 덤이었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로 적응하면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어느날 최근에 산 아이템들을 생각해보니 죄다 룰루레몬 운동복 아니면 유니클로에서 산 기본 이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게 된 것도, 이곳에는 서울만큼 멋진 편집샵이 없다는 점도, 일년 내내 여름이라는 점도 영향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땅 밑으로 꺼져 들어간 경계 경보를 들춰내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기사에서는 싱가포르에서 잘 사서 입고 있거나 이 기사를 핑계로 윈도우 쇼핑을 하며 위시리스트에 올린 아이템과 브랜드를 출신 도시별로 살펴보겠다.
🇪🇸 바르셀로나, 스페인
@gimaguas
쿠바어로 '쌍둥이'를 의미하는 'jimaguas'에서 유래되었는데, 자매인 클라우디아 Claudia와 사야나 두라니 Sayana Durany가 설립한 패션 브랜드이다. 바르셀로나 베이스이며 대부분의 제품을 스페인에서 생산하다. 이 브랜드는 공예적 디테일에 집중한 디자인을 추구하며, 지역 사회의 예술가와 장인들과의 협력을 통해 제품을 제작하는 것도 특징이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 온 골드 주얼리, 마다가스카르에서 제작한 깅엄 패턴의 모자 등이 있다. 국내에는 Franca 백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출처: gimaguas 공식 인스타그램 @gimaguas
내가 구매한 제품 중 가장 만족하는 것은 tacha skirt와 ete dress이다.
tacha skirt는 니트가 섞인 신축성 있는 소재로 된 미디 스커트인데 허리 부분에 은단추 같은 장식이 있다. 검은 셔츠에 흰 단추를 보면 못 본 눈을 구하고 싶어질만큼 단추 같은 디테일에 예민한 편인데, 기마구아스는 이런 디테일들에 강하다.
출처: gimaguas 공식 웹사이트
ete dress는 발리에서 발리 느낌을 제대로 내게 해준 아이템이다. 기마구아스에는 일상복 외에도 지중해에 놀러가서 입기 좋을만한 아이템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 실제로 소재도 바닷물이나 모래에도 강하다. 여름 태양과 바다를 좋아한다면 살펴보기를 추천한다.
출처: depop @_florence_
@paloma wool
팔로마 라나 Paloma Lanna가 이끄는 바르셀로나 기반의 자유롭고 예술적인 감성을 가진 브랜드이다.
이들은 단순히 옷과 잡화를 만들기 위한 브랜드가 아닌, 예술과 패션을 실험하는 ‘프로젝트’로 자신들을 정의한다. 여러 로컬 아티스트와의 협업 뿐만 아니라 건축가와 들판에서 울로 피라미드를 만들어 ‘함께의 힘’을 표현하는 것과 같이 패션에 국한되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이중 아마 가장 많이 회자가 되었던 것은 2023 S/S시즌 여성의 목욕을 주제로 한 런웨이일 것이다. 몸의 실루엣이 드러나는 얇은 니트를 입은 여성들이 차례로 목욕탕 안으로 들어와 몸을 씻고,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를 씻겨 주기도 하며, 카메라를 응시한다. 이는 성경의 ‘밧세바 (Betsabé)’를 모티브로 한다. 밧세바는 흔히 남성(다윗왕)의 권력에 의해 이용된 여성으로 비춰졌다. 팔로마 울은 기존의 이야기에 담기지 않았던 새로운 여성의 시선을 담아 런웨이를 구성하여 주체적인 여성상이라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이렇듯 팔로마울은 패션을 통해 ‘여성의 주체성’과 같은 가치를 적극적으로 전달한다.
출처: 팔로마울 23SS runway
이들이 진행해 온 프로젝트와 런웨이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산 아이템은 허리선은 블루 계열, 이외의 부분은 옅은 스트라이프 패턴이 들어간 팬츠인데, 공홈에서도 내려간 작년 SS시즌 제품이다. 봄, 여름에 입기에 적합하고, 싱가포르에서도 슬랙스 같은 바지들만 입기에 지루할때 입을 수 있는 재밌으면서도 어디에나 입을 수 있는 팬츠라 아직까지도 만족스러운 구매이다.
🇩🇰코펜하겐, 덴마크
@Cecilie Bahnsen
세실리아 반센은 미니멀한 로맨틱함을 보여주는 브랜드로, 자수, 퀼팅, 시어 소재 등 텍스처를 다양하게 활용하여 전통적인 쿠튀르 기법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이템들로 유명하다. 인스타그램에서 어떤 분이 도서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결혼에 대한 로망이 하나도 없는 본인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너무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분이 입은 드레스가 세실리에 반센이라는 브랜드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이 브랜드에 대한 로망도 같이 생겨 버리게 되었다. 실제로 이 브랜드에는 결혼식을 위한 bridal edit이 별도로 존재하고, 코펜하겐 쇼룸에 방문을 예약하여 직접 시착해볼 수도 있다.
내가 봤던 ‘그’ 사진은 찾지 못 했는데, 대략 이런 느낌이었다: 유쾌하고, 자연스럽고, 다채로운 디테일이 있는 작은 축제 같은
출처: Vogue Scandinavia, This editor bride wore a quilted set by Cecilie Bahnsen for her Brooklyn wedding
몰론 결혼식 외에도 일상복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옷들도 충분히 많다.
출처: cecilie bahnsen 25 Resort collection
출처: cecilie bahnsen 24SS runway
출처: cecilie bahnsen 23SS collection
최근에는 이 특유의 로맨틱함을 가지고, 거의 대척점에 있을 것 같은 브랜드들과의 협업도 선보이고 있다. 25FW에는 노스페이스와 함께한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아웃도어룩에도 반센스러움을 잘 녹여내어 브랜드를 더 단단히 만들어 나가고 있는 듯하다.
출처: cecilie bahnsen FW25 runway
아직 소장하고 있는 세실리에 반센은 없다. 아쉬운 대로 싱가포르 도버 스트릿 마켓에 들어와 있는 피스들을 가끔 입어만 보는데, 그것만으로도 지금은 기분 좋은 경험이다. 앞으로의 브랜드 행보도 지켜보며 소장할 수 있는 그날까지 화이팅을 외쳐본다.
🇯🇵 도쿄, 일본
@PLEATS PLEASE ISSEY MIYAKE
설명이 필요 할까, 모두가 아는 바로 그 이세이 미야케다. 한 장의 천으로 봉제 없이 가볍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든다는 점으로 시작해 22년에 창업자인 이세이 미야케가 별세한 후에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브랜드이다. 이세이 미야케 셋업이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데, 옷의 독창성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도 몇 해 전 시착해보았을때 너무 어울리지 않아 헛웃음쳤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는 나도 이 브랜드를 소유하고 싶다는 마음을 버리지 못 했다. 인턴의 시선에서 멋있는 선배님들은 모두 이세이 미야케를 입고 계셨다. 옷이 사람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괜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 셈이다.
그러다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안 이세이 미야케 매장에서 시즌 오프 세일을 한다길래 (세일 안 하는 품목까지도) 시착을 해보다 만다린 칼라의 플리츠 플리즈 셔츠를 만나고 말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전과 달리 꽤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여름 나라에서도 긴 팔, 긴 바지를 선호하는 필자의 취향을 저격하는 가벼운 소재가 그 다음날도, 그 다음주도 아른거렸다. 큰 마음 먹고 구매하여 최근 서울 출장 때 피부처럼 입고 다녔고, 싱가포르에서는 재택 근무할때 줌 미팅용으로 안성 맞춤이다. 구멍 나겠다는 코멘트도 있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집에서도 느슨해지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해주는 플라시보 효과까지 주는 마법을 지닌 옷인걸.
출처: La Garconne
번외로, 다른 서브 브랜드인 me ISSEY MIYAKE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합리적인 가격에 보다 과감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어, 너무 흔히 보이지 않는 이세이 미야케를 소비하고 싶을때 적당할 것 같다.
이런 날개 달린 디자인이나 더 팝한 컬러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출처: me ISSEY MIYAKE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meisseymiyake_offic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