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싱가포르 적응기: 시네마 食편

Editor: 설혜수 @hyssl.kr

싱가포르에 온 지 다섯 달이 되어간다. 이제는 집에 수리나 청소를 맡기거나, 중고 거래를 하거나, 콘도 내 짐을 이용하는 것이 긴장되거나 버벅대지 않게 되었다. 이런 관리자 일 외에도, 서울에서 내가 나를 위해 하던 일들을 새로운 환경에 맞게 지속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서울에서는 당시 다니던 회사 바로 길 건너 있던 코엑스 메가박스나 독립영화를 상영해주는 에무시네마와 라이카시네마를 자주 찾았었다. 여기서는 지난 기사에서 소개한 The projector를 연간 멤버십까지 구매하며 애용하고 있다. 단순히 공간의 차이를 넘어서,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스크린에 영사되는 대상과 사운드에 빠져있노라면 여기가 싱가포르인지 한국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좋아하는 것들을 영위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방인이라는 위치에서 새로운 시선으로 영화를 보게 되기도 했다. 상반기 싱가포르에서 정착하며 보아서 기억에 더 남는 영화 5편을 소개한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양해를 구한다. 꼭 보고 싶은 영화라면, 여기서 기사 읽기를 멈추고 본 후에 다시 찾아와주길 부탁한다.

 

사진출처-영화perfect days,제작-벤더스 이미지스,배급-Anticipate Pictures
  • 퍼펙트 데이즈 (Perfect Days)
  • 장소: The projector, Golden Mile Cinema
  • 시기: 2024.02, 요일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날의 저녁
  • 싱가포르에서 다니는 현 회사 입사 전 백수기간 기간의 사치로, 처음으로 영화관에 가 당일에 상영하는 티켓을 샀다. 아무 정보 없이 본 영화였지만, 올 상반기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로 꼽는다. 도쿄 공공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주인공의 반복되는 perfect days를 그리는데, 성실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것의 미학을 잘 보여준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새벽에 하루가 시작된다. 식물에 물을 주고, 카세트 콜렉션 중 신중하게 하나를 선택해 들으며 출근해, 누군가는 보지 않을 구석까지도 청소한다.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에 가고, 단골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다시 아침이 시작되고, 상영시간 내내 반복된다. 이상하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단조로워 보이는 하루들에 좋아하는 음악, 음식과 그것들을 일련의 순서대로 행하는 그만의 의식이 있고, 우연히 찾아오는 사람들로 인한 변주들이 있다. 木漏れ日(こもれび, komorebi), 점심 시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며 그 순간을 필름 카메라에 담는 장면들에서 삶의 만족과 감사함이 느껴진다. 책임감을 느끼는 일, 좋아하는 것들과 이것들을 지켜내는 하루에 감사하는 삶. ‘완벽한 하루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빔 벤더스 감독은 우리가 알면서도 본질 이상으로 중요하게 포장되고 조장되는 부수적인 것들에 의해 쉽게 간과하는 가치에 대해 도쿄를 배경으로 세련되지만 담백하게 얘기하고 있다. 어스름한 새벽의 도쿄 출근길에 흘러나오는 Lou Reed의 Perfect Day, Nina Simone의 Feeling Good를 포함한 1960-70년대의 팝송으로 이뤄져 있는 사운드트랙은 이 영화의 매력을 배가한다.

 

사진출처-영화past lives,제작-A24,배급-Shaw Organisation
  •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 장소: Sunset Cinema
  • 시기: 2024.05, 해지는 일요일 오후
  • Sunset Cinema는 싱가포르에서 매년 4~5월쯤 센토사섬 해변에서 진행되는 노을과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벤트이다. 모래사장에 앉아 헤드셋을 끼고 보는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과는 또 다르게 다가왔는데, 마침 상영된 영화가 비행기에서 큰 감흥 없이 봤던 ‘패스트 라이브즈'였다. 처음 봤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장면들이 보였는데 (더 이상 비행기에서 본 영화는 본 것으로 치지 않기로 했다) 처음 보았을 때는 로라, 해성과 로라 남편의 관계가 먼저 보였고, 두 번째 보았을 때는 로라의 삶들이 보였다. 로라의 마음 한편에는 늘 서울에서의 자아가 있었지만, 태평양을 건너온 낯설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벽장 속에 묻어두고 굳세게 자라왔을 것이다. 벽장 속에서 울던 어린 로라는 꿈속에서 한국어로 잠꼬대를 하기도 하고, 그 시절을 공유하는 해성을 찾는다. 마지막에 해성과 포옹하는 씬에서 노라는 벽장을 열어 어린 노라를 꺼내주고, 추억하며 더 이상 울지 않게 안아주었던 것이 아닐까.

 

사진출처-영화Challengers,제작-Metro-Goldwyn-Mayer,배급-Warner Bros. Entertainment
  • 챌린져스 (Challengers)
  • 장소: The projector, Cineleisure
  • 시기: 2024.06
  • ‘콜미바이유어네임’으로 알려진 루카 구아디아노 감독의 신작이다. 개인적으로는 전작인 ‘본즈앤올’을 통해서도 고어한 사랑을 통해 연약하지만 단단하게 변화하는 인물들을 보여주어 여운이 남았었다. 또 감독의 고향인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인 크레마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영화들에 관통하는 미감을 온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신작 소식을 들었을 때 지나칠 수 없었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는 영화’라고 답한다면, 이 영화는 그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구아디아노의 계절인 여름에 테니스라는 소재를 더한 연출은 별미다. 테니스 코트 위에 선 선수, 관중, 선수들 사이를 오가는 공. 이들 사이를 오가는 빠른 화면 전환과 각 화면에서의 다른 각도들로 만들어지는 긴박함, 그 속에 인물들의 심리가 잘 묘사된다. 특히 모공까지 보일 것 같은 클로즈업이 인상 깊은데, 동공, 땀방울, 근육의 움직임까지 보게 만든다. 빠른 비트의 사운드트랙도 역동성을 살리는 데 한몫하는데, 영화 ‘소울'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고 ‘본즈앤올'에서도 감독과 합을 맞추었던 트렌트 레즈너(Trent Reznor)와 Atticus Ross(애티커스 로스)가 공동 작업 했다. 2곡만 꼽자면, “Challenger”와 “Brutalizer”를 추천한다. 음악의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이 영화는 한 편의 젠데이아를 캐스팅한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뮤직비디오 같기도 하다.

 

사진출처-영화How to Make Millions before Grandma Dies,제작-GDH 559,배급-Golden Village Pictures
  • How To Make Millions Before Grandma Dies
  • 장소: The projector, Golden Mile Cinema
  • 시기: 2024.06, BBQ 박스에서 배를 든든하게 채운 수요일 저녁
  • ‘할머니가 죽을 병에 걸렸다. 할머니가 죽기 전 환심을 사 재산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은 금쪽이 손자가 여기 있다. 철없는 자식들, 손자들까지도 당신만의 방식으로 한없이 베푸는 할머니의 사랑이 담겼다. 그런 할머니를 보며 점차 진심으로 대하고 갱생하는 손자도 있지만, 끝까지 철없는 아들도 있는 현실적인 영화이다. 일부러 눈물을 삼키려 애쓸 정도로 신파극을 싫어하지만, 어쩐지 이 영화는 미취학 아동 시절 보았던 ‘집으로'(할머니와 손자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의 소재 때문일 거다.)를 떠올리게 만들며, 당시에는 7살의 ‘상우' 보다 어렸던 내가 영화 속 대학생 손자인 ‘M’보다도 더 많은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받은 사랑이 공기 속 수증기처럼 있다 눈이 되어 무겁게 쿵 하고 내려앉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영화가 끝난 뒤 극장에서는 인종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관객이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멍하니 엔딩크레딧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저마다의 사랑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 영화는 현시점 올해 태국에서 가장 흥행한 영화로, 외국인 관객으로서는 따뜻한 색감의 렌즈를 통해 태국의 가정집, 동네, 장례식, 절 - 생활과 밀접한 풍경들을 엿볼 수 있었던 것도 즐거운 요소이다.

 

사진출처-영화 Evil Deos Not Exist,제작-Incline,배급-Anticipate Pictures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
  • 장소: The projector, Cineleisure
  • 시기: 2024.07
  • ‘드라이브 마이 카'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의 상영시간이 3시간이 넘어가는 것과는 상반되게 2시간이 채 안 되는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실제로 처음부터 영화로 기획된 것은 아니고,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의 라이브 퍼포먼스 영상으로 기획됐다가 영화로 발전됐다고 한다) 영화는 제목을 한 단어씩 비추며 시작한다. 그래서 상영 내내 그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겨울이라 무채색에 가까운 일본의 작은 시골 마을을 풍경으로, 영화 속 시간은 상영시간 마지막 10분을 제외하고는 잔잔히 흘러간다. 그래서 되려 대사 한마디, 파란색 비니, 주황색 패딩, 장작, 생와사비, 사슴의 사체, 작은 디테일에 주목하게 만든다. 자연을 감사히 여기는 마을 사람들, 글램핑장을 열어 상업화하려는 도쿄 회사 직원들, 그리고 자연으로 대변되는 숲과 사슴이 있다. 카메라는 알 수 없는 리듬에 시선을 바꿔가며 이 세 객체의 시선을 담는다. 다시 한번 주의력을 요한다. 이 객체 간의 관점의 차이는 서로에게 악을 초래한다. 그렇지만 그 안에 악한 의도는 없다. 그래서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자연과 인간, 공존할 수 없는 두 세계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며 영화는 끝난다. 한 줄의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겹의 파장과 같은 질문들을 낳았다. 선과 악, 갈등과 공존, 인간과 자연, 언뜻 이분법적으로 보이지만 여러 차원으로 얽혀있는 주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에이코 음악감독은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영화음악의 기능은 “관객이 사고하도록 돕는 것. 음악이 관객의 감정을 정의, 강요, 유도하지 않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음악뿐 아니라 이 영화 전체가 그렇다. 다양한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생각의 씨앗이 필요하다면 뻔하지 않은 방식으로 실마리를 제공하는 이 영화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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