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싱가포르 적응기: 住편

Editor: 설혜수 @hyssl.kr

석달 전, 12도의 선선한 서울에서 30도가 넘는 싱가포르로 이사 왔다. 창이 공항에 도착해 숨이 턱 막히게 더운 공기를 들이쉬었을 때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싱가포르가 처음은 아니다. 불과 반년 전에 출장을 온 적도 있었고,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첫 이직 그리고 편도 티켓이 주는 낯섦은 어쩔 수 없었다.

삼개월이 지난 지금, 낯선 것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이게 되었고, 동시에 안정감을 주는 익숙함이 생기게 되었다. 한국 토착민의 여름 나라 적응기를 인간 생활의 삼대 요소라고 하는 의식주로 나누어 보겠다. 그럼, 첫 편인 ‘주’부터 만나보자.


일상 공간 구하기
싱가포르 적응기 첫 번째 과제는 ‘자주 찾는 공간들을 탐색하는 것’이었다. 집에서 축 늘어질 때 의지를 다잡으며 가던 카페, 산책 코스, 몇 시간 안에 기분을 환기할 수 있는 곳들… 서울에서 좋아하는 장소들의 싱가포르 버전이 필요했다. 하다못해 밥을 먹으려고 해도 ‘오늘은 여길 가야겠다'에 ‘여기'가 없으니 식당 검색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서울에서의 일상을 돌이켜보며 필요한 공간들을 찾았고, 여전히 찾고 있다. 그중 필자의 최애 장소 2곳을 소개한다.



@the projectors

퇴근하고 영화 보러 가는 걸 좋아한다. 잡다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때 2-3시간 동안 큰 화면과 사운드 속에서 온전히 그 안에 집중하고 나왔을 때의 그 쾌감을 좋아한다. 그래서 도착하고 첫 주에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영화관을 찾는 것이었다.

the projectors는 싱가포르에서 몇 안 되는 (어쩌면 유일한)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를 상영해 주는 곳이다. 최근에는 pride month를 맞아 LGBTQIA+ 필름 페스티벌 주간을 열기도 했는데, 이처럼 그때그때 테마를 정해서 재상영도 해준다. 2곳의 로케이션을 두고 있고,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Golden Mile Tower 지점은 한때 가장 큰 영화관이었던 Golden Theatre를 재탄생시킨 곳이다. 이전부터 쓰던 원 형식 홀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CGV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극장에 들어가는 순간 생경함을 느낄 수 있다. (연세대 노천극장을 실내로 옮겨놨다고 생각하면 쉽다.) 다른 지점인 Cineleisure 는 백화점들이 즐비한 오차드 로드에 자리 잡고 있고, 이곳은 반대로 신식으로 지어졌다. No Spoilers라는 바와 식당도 같이 운영하고 있어 영화 관람 이외에도 중심가 쪽에서 식사, 쇼핑까지 함께 즐기기에 적합하다.

스카이워커가 등장하는 영화 상영 전 안내 영상이나 입장 안내 방송도 귀여운 포인트다. 또 매주 요일을 정해 DJ night 운영을 하는 등 이벤트도 진행하고, 굿즈들도 제작 판매한다. 매번 갈 때마다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조금씩 달라져서 숨 쉬는 공간처럼 느껴지고, 이곳을 만드는 사람들도 궁금해진다. (언젠가 ybp에서 인터뷰하는 날을 기원해 본다.)



@싱가폴 국립 도서관

카페에서 작업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싱가포르 카페들은 실망스러울 수 있다. 콘센트나 와이파이가 없는 곳들도 많고, 오후 5-6시면 문을 닫는다. 그럴 때 싱가포르 도서관에 가보는 것을 추천한다. 바다뷰를 가진 harborfront library나 파도 모양 책장으로 유명한 orchard library도 방문해 볼 만하다. 필자가 자주 간 곳은 국립 도서관(national library)이다. 부기스 역 근처에 위치해있고, 싱가포르 내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층고가 높고 통유리로 되어 있어 오래 있어도 답답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자리도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다. Casetelli의 아이코닉한 DSC 체어를 쓰는 점도 인상적이다. (도서관에 드림 체어가 있다니!) 한국과 비슷하게 앱으로 자리를 예약하면 그 시간 동안 내가 지정해서 쓸 수 있는 시스템이다. 자리 선정을 잘하면 마리나 베이 샌즈 뷰를 즐길 수도 있다. 운영도 10시까지 하니 그 어느 카페 부러운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공공시설이 있다는 것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한가지 꿀팁이자 고백하자면, 이사하고 첫 한 달간 집에 와이파이가 없어 도서관을 찾았는데, 그냥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wireless@SG이라는 앱을 통해서만 도서관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으니, 인터넷이 필요한 작업을 하러 간다면 집에서 미리 꼭 다운로드를 받고 가도록 하자.


집 구하기
싱가포르 적응기 두 번째 과제는 ‘집 구하기'였다. 마리나 베이 샌즈와 머라이언이 있는 CBD(Central Business District)에 있는 임시 숙소에 머물며 마천루를 구경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지만,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 아닌가. 좋아하는 것들을 소비하고 생산할 수 있는 집을 찾고 싶었다. 오피스 건물 아니면 쇼핑몰뿐이고, 그 안에는 프랜차이즈 옆에 프랜차이즈가 있는 건물 숲에 사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다 이 매거진을 함께하는 친구들과 ‘카통’이라는 동네에 피자를 먹으러 왔었다. 카통은 CBD에서 동쪽으로 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나오는 해변가에 위치한 동네다. 페라나칸 집들*. 작지만 직접 원두 블렌딩까지 하는 카페들, 샵하우스*의 2층으로 올라가면 누군가의 집에 놀러 가듯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레코드 가게들, 낮에 가면 파도 소리와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가 같이 들리는 해변가 공원까지 CBD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날로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에이전트에게 더 이상 다른 동네들은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얘기했다.
*페라나칸 하우스: 말레이 반도로 이주해 온 중국인 남성과 말레이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페라나칸'이라고 한다. 이들이 카통 지역에 많이 살았고, 독특한 외관의 집들을 지었는데 이를 ‘페라나칸 하우스'라고 한다. 파스텔톤의 페인트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데, 알록달록하고 낮은 집들이 붙어있는 이탈리아 부라노섬이 연상된다.
*샵하우스: 1층은 가게로, 2층은 집으로 쓰이는 싱가포르의 건축 양식이다.


그렇게 카통으로 이사 왔다. 그런데 당장 식탁이 없어 캐리어 위에서 컵라면을 먹었다. 집으로서 기능하기 위한 도구들이 필요했다.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1인 가구인 한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결혼 전까지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싱가포르 1인 가구 비중은 올해 기준으로 15% 정도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대부분의 가구가 2인 혹은 4인 가족에 맞춰져 있다. 싱글을 위한 제품은 많지도 다양하지도 않은데, 가격도 한국에 비교하면 ‘이 가격에 이 퀄리티라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경우들이 빈번하다. 그만큼 마음에 드는 가구를 찾기가 어려운데, 필자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한국에서 가지고 오는 것이고, 차선책으로 싱가포르에서 방문해 볼 만한, 발품 팔며 찾은, 장소들을 공유해본다.



@Lorgan’s the retro store

‘이런 곳에 가게가 있나?’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면 맞게 찾아갔다. 웬 사무실 건물 2층에 위치하고 있는 빈티지/중고 가구점이다. fortytwo, hipvan(한국으로 치면 오늘의집 정도 되는 곳이겠다.)에서 결국 원하는 가구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귀신같이 인스타그램이 이곳 계정 포스트를 추천해 줬다. 흔하지 않은 디자인의 가구, 조명과 소품을 판매하고 있고 가격대도 나쁘지 않다. 필자는 의자를 보러 갔다가 커피 테이블을 구매했다. 스틸 다리에 나무 상판으로 된 정사각형의 테이블인데, 상이한 온도의 재질이 같이 쓰인 게 마음에 들었고, 하부에 LP, 잡지, 책 등 좋아하는 것들로 채울 상상까지 해버리고 나니 영수증에 싸인하고 있었다. 가구 보는데, 허탕만 치다 마음에 드는 구매까지 한 장소라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Tiger and Arcadia

카통 Joo Chiat 로드에 위치한 인테리어 소품 가게이다. 나비 벽 장식 도자기, 여인의 두상을 형상화한 화병, 튤립 모양 촛대와 같이 이국적인 소품들이 많은, 이제는 참새 방앗간이 된 곳이다. 다양한 컬러와 재질의 소품들을 조화롭게 진열해 두셔서 구경할 맛이 난다. 얼마나 색이 다채롭냐면 이곳에서의 오렌지색은 에르메스 오렌지, 형광이 섞인 오렌지, 해 질 녘의 오렌지까지 다 다른 오렌지들이 있다. 이런 걸 대체 어디서 가져올까 싶은데, 유럽, 멕시코 각지에서 로컬 장인들이 만드는 제품들을 찾아오신다고 한다. 스탭 분들이 이 제품을 어떻게 인테리어에 활용하면 좋을지도 조언해 주시는데 이 대화까지 시작했다면 일찍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접는 게 좋다.


@carousell

한국에 ‘당근'이 있다면 싱가포르에는 ‘캐로셀'이 있다. 이 가격 주고 사고 싶진 않은데, 이것만큼 괜찮은 디자인의 제품을 찾지 못할 때, 캐로셀에 가면 된다. 동일한 새 제품을 훨씬 저렴하게 파는 감사한 분들이 있다. 브랜드에서 B급 제품을 할인된 가격으로 올려놓은 포스팅들도 있으니 잘 뒤져보자. 당근하면서 평소에 가보지 못하는 로컬 동네와 콘도/HDB*를 구경하는 재미는 덤이다.
*HDB: Housing and Development Board, 싱가포르 주택 개발을 담당하는 정부 기관이지만 통상적으로 정부에서 주관하는 아파트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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