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달리기를 말할 때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Editor: 설혜수 @hyssl.kr


싱가포르에 와서 안 하던 걸 많이 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달리기’다.

서울에 살때도 집 근처의 보문천, 청계천을 따라 달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뛸 만하면 겨울이 찾아오고, 여름에는 초파리 무리가 찾아왔다. 괜한 핑계를 대어본다.

늘 마음 한구석에는 달리기를 루틴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이런 로망은 하루키의 에세이인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에서 비롯되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로 처음 접한 하루키는 텍스트만으로도 호기심을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지루할만큼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삶과 업을 대하고, 이를 멋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이 요즘 말로 나의 추구미와 맞닿아 있었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같은 흔한 (때로는 너무 도파민에 절여진듯한) 매체가 아닌 문자만으로 호기심을 일으키는 대상을 만난 것이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왔고, 그의 소설보다도 에세이를 더 먼저 읽게 되었다. 그중 가장 재밌게 읽은 것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인데, 거의 매일 10km씩 달리는 꾸준함과 달리면서 책 한 권을 낼 정도의 다채로운 생각을 이끌 줄 아는 모습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아직 러너의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많이 부끄럽지만, 꾸준히 달리려 하고 있다. 달리는게 이상하지도 않은 환경이다. 퇴근 시간 회사를 나오면  ‘여기 사람들은 다 뛰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리 지어 마리나 베이 샌즈 주위를 달리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로 22년 진행된 설문에 따르면 가장 많이 하는 운동으로 ‘조깅/달리기’를 꼽은 비율이 청소년(1319)은 50%, 청년층(2039)은 42%에 달한다. 뛰는 문화가 잘 자리잡혀 있는 나라에서 운이 좋게도 이스트 코스트 파크 (east coast park, 줄여서 ecp 또는 이코팍이라고 부른다) 근처에 살게 되었다. 문 밖을 나서 5분이면 해안선을 따라 만들어진 공원에 도착한다. 안 뛰고 배길 수 있겠는가. 이코팍은 자연스레 나의 유일무이한 러닝 루트가 되었다. 오전 10시만 되어도 무덥기 때문에 오전 7-8시의 아침이나 해가 완전히 진 오후 8-9시의 저녁에 달리고 있다. 아침에 달리면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떼어내어 온 몸의 세포들을 깨우고 있음에 뿌듯해진다. 주로 주말에 달리고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캠핑 의자를 가지고 나와 독서하는 사람들도, 산책 나온 온갖 종의 강아지들도 ‘101마리 달마시안’ 의 배경화면처럼 보인다. 유니폼을 맞춰 입고 짧은 다리로 필사의 축구 경기를 펼치고 있는 어린 아이들과 그 뒤에서 생중계하듯 동영상을 찍으며 응원을 보내는 부모님들도 보인다. 저녁에는 비교적 사람이 없어서 조용한 편이고, 노래를 듣지 않으면 파도소리를 배경음 삼아 달릴 수 있다. 요즘 ‘행복’하면 이런 장면들이 떠올라서 상기된 얼굴을 스타벅스 아아로 식히며 다시한번 달리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하루키는 왜 많은 운동 중 달리기를 선택했을까. 달리기는 운동화만 있으면 내가 원할 때 시작하고 끝맺을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도 덜 한 편이다.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가 아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나를 향해 뛸 수 있다. 이곳에 와서 하루하루가 뭔가 부족하고 찜찜함이 들 때, 달리기로부터 위로를 받고 있다. 처음 뛸 때는 1km도 뛰기 힘들어서, 뛰기를 빙자한 경보를 했다. 그다음 뛸 때는 지난번보다 거리를 조금 더 늘리거나, 같은 거리라도 시간을 줄여보려 한다. 이때 중요한 포인트는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주는 거다. 내 앞을 뛰어가는 고수 러너들을 페이스 메이커 삼아 뒤따라가기도 하면서, 어떤 때는 아드레날린 날리는 플레이리스트를 동력 삼아 달려 나가다 보면 미션 클리어다. 그렇게 처음에는 어떻게 숨 쉬어야 할지도 몰랐는데, 어느 순간 뛰는 리듬에 맞춰 코로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면서 ‘달리면서도 평온할 수 있구나’를 느끼게 되는 단계까지는 이르게 되었다. 달리기 기록을 본다면 온전히 내가 나를 깨는 기록들인 것이다. 로망으로 시작했지만, 몸과 마음의 근육을 늘리고 싶었던 때에 알맞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도 내가 달리며 하는 생각들을 에세이로 쓴다고 하면 절반 이상은 “하.. 헉.. 후…” 같은 의성어일 거다. 지금처럼 조금씩 더 호흡하며 달리다 보면, 늘어나는 거리만큼 자신과의 대화의 밀도도 높여나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번외. ‘이왕 뛰는 거면 폼나게 뛰어야지’하는 생각으로 구매를 위해 눈여겨 보고 있는 러닝 관련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브랜드 두 곳도 함께 소개하며 이번 기사를 마무리한다.

@optimistic runners
베를린 기반의 러닝 의류 브랜드이다. 몇 달 전 인스타그램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을 때만 해도 로컬 한 브랜드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불과 지난 주말 서울에서 mtl 카페와 함께 러닝 이벤트를 진행할 정도로 한국인 사이에서 바이럴을 타며 빠른 속도로 유명세를 쌓는 모양이다. 정기적인 러닝 이벤트도 운영하고, 베를린 러너들의 인터뷰도 웹진 형태로 내보내면서 아이덴티티를 다져가는 행보가 재밌게 느껴진다.

@anteberlin
여기도 베를린 기반의 브랜드이고, 인스타그램 계정의 첫 게시글이 22년 11월로 역사가 길지 않은 신생 브랜드로 추정된다. 판매하는 상품이 많지 않고, 후기도 많이 없어 러닝하기에 기능성이 충분한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들의 소개 글을 읽었을 뿐인데 티셔츠 하나라도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두 가지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하나는 패션과 기능을 모두 충족하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진작가, 시인 등 다양한 재능의 범주에 있는 사람들이 협업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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