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현대인의 심포지엄

Editor : 박지현 _j_ihn.b

 

건강을 챙기자! 맘을 먹는 순간, 언제나 그랬듯 술을 조금 줄여야겠다 다짐한다. 정말 행복했던 시간도 우울의 끝을 달렸던 시간들도 술과 함께 했는데, 이런 거리두기는 술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술 한번 먹자” 이야기 건네는 것은 많은 것을 포괄한다. 특히 기쁘거나 축하해야할 일이 있을 때, 무언가 상실하는 경험을 했을 때, 화가나 감정이 부글부글할 때, 누군가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을 때 우리는 “술 한번 먹자” 한마디를 건네 곤 한다. 


술은 더 과감하게 심연의 이야기를 드러내게 한다. ‘에이 뭘 이런걸 이야기해.’ 라고 치부하며 삼켰던 이야기들을 툭 뱉어버린다. 예를 들면, 어제 꾼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상대에게, “이 꿈은 어떤 의미일까?” 를 묻고, 의미없지만 의미있는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숨겨두었던 마음을 고백하는데도 술이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서운했거나 동경해왔던 마음도 술의 힘을 빌어 슬며시 밀어 넣을 수 있다. 꼭 취기에 힘을 빌린 대화들이 아니더라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짠짠 몇잔을 주고 받고 나면 뭔지 모를 친밀감이 생긴다. 한잔 두잔 주고 받듯이, 상대의 생각도 음미하며 주고받게 된다. 상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그를 이해하게된다. 



심포지엄

술이 주는 용기와 친밀감의 역사를 되짚어 올라가보면, 그곳엔 ‘심포지엄’이 있다. 우리는 보통 ‘심포지엄’을 생각하면 세미나나 학술토론회를 떠올린다. 그 어원은  syn- (함께) + posis (마심) = “함께 마시는 것” 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심포지엄은 와인을 마시며 시를 낭송하고 철학을 토론하며 음악을 즐기는 자리였다고 한다. 기원전 370년에 쓰여진 플라톤의 [심포지엄]이라는 대화편을 들여다보면, 술이 사고와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대화편에서는 7명의 인물이 등장해 사랑에 대해 탐구한다. 이야기는 아테네의 시인 아가톤이 비극 작품으로 상을 받은 뒤, 집에서 연 연회에서 시작되는데, 전날 과음한 사람들을 본 등장인물 1-의사 ‘에뤽시마코스’는 과음과 술 강요는 좋지 않다며 적당히 마시며 이야기를 하자고 한다. 그러더니 사랑의 신 ‘에로스 (Eros)’를 찬미하는 노래는 지금껏 찾아본적이 없다며, 에로스를 찬미하는 연설을 한 명씩 돌아가며 해보는 것은 어떻냐고 제안한다. 조금의 취기와 함께한 이 대화 주제는 다른 이들의 흥미를 일으켰고 그렇게 대화는 시작됐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사랑에 대한 대화’를 넘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욕망을 어디를 향하는가, 진리를 어떻게 갈망하게 되는가에 대한 아주 깊이 있는 대화로 이어진다.이 대화에서 술은 단순한 음료나 배경 소품이 아닌, 인물의 사적인 고백, 철학적 상상, 자기 노출을 가능하게 하여 경계를 허문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특히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알아가는가에 대한 철학적 체계인 인식론*을 드러내며, 이를 통해 [심포지엄]은 현대의 철학도들에게도 바이블과 같이 여겨지는 고전이 되었다. 


피상적일 수 있으나 철저히 술의 관점에서 이 대화편을 되짚어 보자면, 기원전 370년 전에도 과음은 멀리 했으며 약간의 술은 대화에 완연함을 주고 조금 더 과감하게 생각을 드러내게하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심연의 대화들을 이끌어냈다. 이 모든 위대한 대화들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니, 그 사실 자체가 ‘세상 사는 거 다 똑같다’ 느끼게 한다. 조금의 과장을 보태면 ‘진정한 인간다움은 취기에서 오는 것인가!’ 하는 취기있는 생각까지 하게한다. 심포지엄이 이런 의미라면, 다들 여느 가게 한 켠에서 이런 심포지엄을 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 대화를 회고해본다면, 아마도 모두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만큼 깊은 사유의 대화를 했을 것이다… 하하

*인식론 (epistemology) :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알아가는가에 대한 은유이자 철학적 체계
*플라톤 [심포지엄] 대화편 (link)



현대의 심포지엄 

내가 고대의 그리스 철학자나 지식인은 아니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현대인에게 이런 심포지엄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우리도, AI가 도대체 인간에게 무엇인지? 좋은 파트너는 어떻게 만나야하는지?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는게 힘든지? 에 대한 대화편을 열어봐야하지 않을까. 많은 선택지와 모호한 경계에 있는 현대인에게 이러한 즐거운 사유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현대인의 심포지엄을 위한 몇가지 현대의 ‘술’을 소개한다. 



➊ 위스키 

보리, 밀, 옥수수등을 발효시켜 증류한 후, 오크통에서 수년간 숙성시켜 갈색빛의 위스키가 완성된다. 일반적으로 40도 이상의 높은 도수와 바닐라, 캐러멜, 스모키등의 복잡한 풍미를 가지고 있는데, 스코틀랜드의 스카치 위스키 (scotch whisky), 미국의 버번 (Bourbon), 아일랜드의 아이리시 (Irish) 위스키가 대표적이다. 이런 강력하고 복잡한 풍미 덕분인지 대화를 흐트리기 보다는 말을 가다듬게 한다.

글렌피딕 (Glenfiddich), 조니워커 (Johnnie Walker), 카발란 (Kavalan) 같은 대중적인 위스키보다, 더 독특한 위스키로 항연을 즐기고 싶다면 아래의 위스키를 추천한다. 침묵과 향연을 즐기는 한 친구의 추천리스트를 가져온 것이니 믿을만해보인다. 



  • 아드벡 (Ardbeg) 

Ardbeg Uigeadail

(출처ㅣ 나무위키)

스모키함의 끝판왕으로 부릴 만큼 개성이 강한 스코틀랜드 아일라(Islay) 지역의 싱글 몰트 위스키이다. 강한 피트(peat) 향이 특징으로 스모키, 흙, 바닷바람, 숯 향이 나는 피트 위스키이다. 숙성년도와 캐스크 종류에 따라 10년산, 8년산, 안오 (An Oa), 코리브레칸 (Corryvreckan), 우가다일 (Uigeadail) 여러 종류가 있는데, 가장 대중적인 것 10년산이다. 진한 스모크와 함께 바닐라, 커피, 토피, 바닷내음이 어루어지며 조금의 레몬도 느껴지는 위스키로 입문자에게는 다소 도전적일 수 있지만 마니아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컬트적 존재감의 술이라고 한다. 


- 추천인의 한마디 : 바베큐, 치즈 같은 짠 음식과 같이 먹는 것을 추천한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꽝꽝 얼은 얼음이 들어간 온더락잔에 술만 먹었을때 가장 술 자체의 맛을 잘 느끼며 마실 수 있음. 비 오는 날 Lou Reed나 LP의 음악 (팝 + 컨트리 포크)을 들으며 마시면 피키블라인더스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덤.


* 피트(peat) : 습지의 토양을 활용해 뽑아낸 원액
* 캐스크 : 위스키를 숙성시키는 오크 나무통


  • 아란 (Arran) 

피트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과일향과 시트러스 계열의 부드러운 이 위스키를 추천한다. 이 역시 스코틀랜드 태생으로 본토에서는 조금 떨어진 아란 섬에서 생산되었다. 여러 종류의 캐스크를 사용하여 생산해서 다양한 라인업의 위스키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 추천인의 한마디 : 위스키에 익숙하지 않아도 바에서 실패 없는 한 잔을 고르고 싶을 때, 추천. “아란 온더락이나 하이볼 한잔요.” 처음 가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도 바닐라를 고르면 최소한의 만족은 보장되는 것과 같은 이치.



 

➋ 와인 

와인은 늘 함께 마시는 술이었다. 고대의 심포지엄에서부터 현대의 소셜 다이닝까지 와인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와인은 포도의 품종, 원산지, 숙성 방식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좋아하는 와인의 품종이나 좋아하는 양조장을 기억해두는 것이 하나의 방법인데, 먼저 와인의 종류를 설명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레드와인 : 적포도 껍질과 함께 발효하여 탄닌이 풍부하다. 주요 품종으로는 까베르네 소비뇽, 피노 누아, 메를로, 시라 등이 있다. 
  2. 화이트와인: 껍질 제거 후 투명한 과즙만 발효하여 산미가 있고 가볍지만 과실향이 풍부하다. 주요 품종으로는 샤르도네, 소비뇽 블랑, 리슬링 등이 있다. 
  3. 스파클링 와인 :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와인으로 프랑스의 샴페인, 이탈리아의 프로세코, 스페인의 카바가 있다. 
  4. 로제 와인: 붉은 포도 껍질을 짧게 접촉시켜 핑크빛만 얻은 와인이며, 레드보다 가볍고 화이트보다 과일향이 강하다. 
  5. 오렌지 와인: 화이트 포도를 레드처럼 껍질째 발효한 와인으로 더 산미가 있으며 약간의 탄닌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에 충격적인 신선함을 가져다 준 오렌지 와인과 레드와인을 발견했다.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조금 더 특별하고 신선한 느낌의 와인으로 함께 하는 자리를 더 통통튀게 만들고 싶다면 아래의 와인을 추천한다. 



  • LE COSTE’S BIANCHETTO (link)

 

이탈리아 라치오 (Lazio) 지역의 그라도리 (Gradoli) 마을의 Le Coste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오렌지 와인으로, 주요 품종은 Procanico이다. 이 와인의 온라인 테이스팅 노트에는 “중간 바디의 오렌지 와인으로, 백도, 살구, 오렌지 제스트, 말린 바질 등의 아로마와 함께 강한 미네랄리티를 지니고 있습니다” 로 기재되어 있는데, 내가 느낀 이 와인의 느낌은 강렬한 살구향에 조금의 매콤함과 탄산감이 느껴져 그 강렬함이 오래 기억되는 오렌지 와인의 정석 그 자체였다. 다들 화이트와는 비교 불가한 이 달큰 향긋 콤콤한 와인을 즐겨보시길! 

 

  • Jean Foiard Morgon Côte du Py 2022  (link)

 

진한 루비색의 체리, 블루베리 과실향의 와인. 프랑스 부르고뉴 중 하나인 모르공 (Morgon Côte du Py)에서 생산된 이 와인은 가메 (Gamay)라는 품종으로 만들어진 와인이다. 피노누아보다 조금 더 무겁지만 과실향이 나는 와인을 찾는다면 ‘Gamay’가 들어간 레드와인을 찾으면 된다고 한다. 너무 가볍지만은 않은 상큼한 루비빛의 블루베리 레드와인을 찾는다면 이 와인을 추천한다. 





➌ 백주 

백주는 수수, 밀, 보리, 쌀등을 발표시켜 고온에서 증류한 중국 고유의 증류주로, 백주의 도수 또한 40도에서 60도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도수가 높은 술이다. 위스키보다는 깔끔한 향이여서 그런지 한 모금 마셨을 때, 위를 타고 내려가는 화끈 시원함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위스키는 입안 전체에 향을 퍼트리며 마신다고 하면, 백주는 수직으로 내리 꽂아 머금은 뒤에 남겨진 향을 즐기게 한다. 최근 나의 심포지엄에 큰 역할을 했던 중국 백주, ‘몽지람’을 소개한다. 


  • 몽지람 (藍)

 

중국을 대표하는 백주로, 발효 토양에서 발효 후 도자기 항아리에서 최소 20년 이상 숙성된다. 도수는 52도 정도로 높지만, 정말 부드럽고 끝에는 파인애플 꽃향이 남는다. 숙성 기간에 따라 M3, M6, M9으로 나뉘는데, 가격과 맛 모두를 따지면 M6 를 추천한다. 도수가 믿기지 않을만큼 특유의 목따가움이 없는 술이다. 한번 맛본 후 가족끼리 무언가 기념해야하는 일이 있으면 꼭 한병씩 사들고 가는 선물 중 하나다. 

 




과도한 음주는 건강을 해치지만요..

고대의 심포지엄에서는 주로 포도주를 마셨지만, 현대의 심포지엄은 즐길 수 있는 술도 다양하다. 늘어난 선택지에 숙취만 늘어난다. 하지만, 다양한 주제에는 다양한 주종이 필요한 법. 현대인에게 주어진 수많은 과제를 현대의 심포지엄을 통해 해소해나갔으면 한다. 조용히 음악과 함께 숙고 하고 싶을 때는 위스키를, 찐한 기쁨을 만끽하고 싶을 때는 백주를, 친구들과의 좋은 저녁을 즐기고 싶을 때는 와인을, 모든 고민을 털어내버리고 싶을 때는 맥주를, 고민을 파고파고 우울을 파고들고 싶다면 소주를, 존재에 대해 고찰하고 싶다면 이 모두를.. 


뭐든지 적당해야하겠지만, 조금의 술로 아주 좋은 대화와 시간과 추억을 쌓을 수 있다면 굳이 멀리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심포지엄의 대화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보통 이러한 대화에 결론이 있기 어렵다. 어제 네가 꾼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같은 결론 내리기 어려운 난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더 친밀해질 수 있고 서로 더 이해할 수 있다. 공감과 연대는 모두 그런 마음에서 시작되는게 아닐까. 이것이 내 개인적인 사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닌, 현대인의 심포지엄이 필요하다 말하는 이유이다. 이런 심포지엄과 함께 복잡한 세상도 그리 복잡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위안을 가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과도한 음주는 건강을 해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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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

술이 몸을 망칠 순 있으나 정신은.. 잠깐 살려준다. 딱 그 정도로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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